현존의 깨달음

희생이 아니라, 베품에 집중하라

한아타 2012. 2. 10.

기적을 이루는 면에 있어서 중요한 부면 중 하나가 “나누어 주는 일”이다. 즉, 누군가에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창조를 극대화시킨다. 이 일이 창조의 에너지를 더 없이 안전한 방법으로 활성화시킨다. 앞서 잠깐 살펴 보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즉, 우리의 가능성에 대한 감정적 무게를 어디에 비중 있게 두는지 스스로도 모르고 있을 수 있다.

 

 

 

좀 쉽게 이야기 해서, 우리는 우리가 잘 되거라고 말하고 있고 그렇게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내면의 심연 깊은 곳에서는 “일이 그르쳐 질 수 있다.”는 사실에 더 많은 감정적 무게를 두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심연 깊은 곳의 목소리를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자신의 상위자아는 정형화된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주로, 감정의 신호로 우리에게 말한다. 상위자아 즉, 내면의 자아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많이 검토하게 되겠지만, 사실… 자신의 상위자아는 우리보다 훨씬 현명하고 지혜롭다. 그는 기적을 이루는 실체이면서 때때로 현명한 판단을 내리도록 우리를 돕는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어떤 사실에 대해 믿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내면의 자아도 믿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내면의 자아는 일이 그르쳐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더 많이 움츠러 들고 있다. 두려워하고 있고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가 때때로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더 많은 것을 주변에서 이끌어 오게 한다. 하지만, 자신의 끔찍한 처지를 생각하면, 자신의 무의식적 자아가 이 사실을 완전히 믿어 줄지 만무한 일이다.

 

이 때에 필요한 것이 바로 “나누어 주는 일”이다. 즉, 자신이 아직도 행복하며 누군가에게 뭔가 힘을 보태어 줄 수 있다는 것을 무의식조차도 믿게 하는 것이다. 그 나누어 주는 일이 꼭 눈에 보이는 금전일 필요는 없다. 일부러 누군가를 위해서 시간을 사용해 주고 그의 말을 들어주며 그에게 위로의 근원이 되어 주는 것이다. 나의 “에너지”를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는 일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우린 아직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나누어 주는 일을 할 때에도 자신의 행동과 관련하여 “희생”이라는 생각이 들면 안된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희생”이라는 말은 “결핍”이라는 요소를 어느 한구석 가지고 있는 말이다. 당연히 “결핍”에 집중하면 그것은 결핍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희생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멀찌감치 치워버리도록 하자.

 

대신에 우리는 “베품”에 집중해야 한다.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베풀 수” 있는 사람은, 베푸는 나누어 주는 일을 하는 당사자가 “풍요로운 사람”일 경우에만 가능하다. 당신은 자신이 풍요로워지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더 이상 “희생”에 집중하지 말고 “베품”에 집중하라. 두 가지 다 “주는 일”이지만, 그것들이 우리의 생활 가운데 끌어 오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테러사 수녀는 살아 있는 동안 “반전운동”과 관련된 제의가 들어 오면, 그것보다는 “평화운동”을 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어떤 일에 대한 “저항”이 오히려 동일한 것을 더 끌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테레사 수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반전”이 아니라, “평화”에 집중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말한 것이다. “전쟁의 종식”이라는 이상향은 같지만, 둘 사이에 집중되는 에너지의 “방향성”은 같은 것일 수 없었다. 그러므로 당신 역시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기꺼이 하기를 원하면서 희생이 아니라, 베품에 집중하기를 바란다. 창조의 에너지는 당신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풍요로 안내할 것이다.

 

 

 

 

댓글

자동 창 열기

자동 창 열기

작가 한아타의 세상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