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의 깨달음

배설의 과정을 통해 알게 되는 의식의 작용

한아타 2022. 1. 31.

배설과 우리들의 의식

 

볼일이 급해서 항문에 조여오는 찌릿한 느낌을 온몸으로 전율하며 느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주변에 화장실은 없고 화장실 있는데 까지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다. 걸을 때마다 느껴져 오는 아련한 진동이 자신을 미치게 만든다. 피가 꺼꾸로 치밀고 골반에 마비 증세가 오는 것 같다.

 

 

당신이 한번쯤 경험했던 이런 상황을 떠올려 볼 수 있는가? 아마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그 상황을 잘 이겨내고 결국 당신은 순조로이 구원과도 같은 화장실을 만나 순산에 성공한다. 승리한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항상 승리로 이어지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패배는 평생을 두고 잊혀지지 않는 고통스럽고도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이런 상황을 이야기로 꺼낸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잘 생각해보라. 그리고 떠올려보라. 길바닥에서 정처 없이 화장실로 향하는 자신의 모습과 감각을 잘 더듬어보기 바란다. 유쾌하지 않은 상상인가? 괴롭히지 않을 테니 한번만 떠올려보라. 지금 떠올려 보라는 것은 당신의 항문을 자극했던 압박감과 통증의 변화를 음미(?)해 보라는 것이다. 어느 때에 당신은 가장 극렬하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는가?

 

당신의 대답이 옳다. 화장실 입구에 다다르기 바로 전, 혹은 양변기 앞에서 당신의 바지와 스커트를 내리기 바로 직전에 당신은 가장 강렬한 다급함과 요동치는 고통을 느끼게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아마 혹자는 너무 당연한 결과라고 말할지 모른다. 통증이 일어나기 시작한지 가장 오래된 시간이니까, 당연히 그 때가 제일 고통이 극심한 것 아니겠냐고 말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 느낌에 대해 좀 더 정직하고 정확하게 이야기해 보자. 배와 항문에서 오는 그 때의 압박감과 통증은 결코 시간에 비례해서 늘어나지 않는다. 이 통증이라는 것이 일렁이는 물결과 같은 것이어서 한번 밀려왔다가 사그라 들기도 하고 다시 쓰나미처럼 크게 밀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거의 예외 없이 변기 앞에서는 가장 강력한 메가톤급 압박을 느낀다. 이제 내가 말하려는 것을 보다 직접적으로 언급해 보기로 하겠다.

 

의식과 고통의 관계

 

배에서 약간의 이상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급기야 대장과 항문에서 알 수 없는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이곳에서 내가 아는 제일 가까운 개방 화장실은 300미터쯤 걸어야 하는 곳이다. 가까운 곳이 없나 두리번거린다. 화장실이 열렸을 것 같은 옆 빌딩으로 뛰어 들어간다. 떨리는 마음으로 화장실 손잡이를 돌렸는데 이런, 아니나 다를까 문은 잠겨져 있다. 내가 아는 개방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나는 두 세 차례 더 다른 빌딩의 화장실을 컨택한다. 하지만, 결과는 매 마찬가지 .

 

 

이런 험난한 여정의 드라마를 쓰면서 나는 내 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통증의 변화에 주시하게 된다. 의미 없이 그냥 통증이 왔다 가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열린 화장실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빌딩에 들어설 때부터 통증의 깊이는 극심해지고 서서히 아련해져 온다. 그리고 기대가 사그라들 무렵 진통 역시 약간 완화됨을 경험한다. 이제 눈앞에 지하철 역사가 들어오면서 저 곳만 가면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차오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내 기대감이 차오를 때마다 고통 역시 증가됨을 경험하게 된다.

 

가끔 이런 상황에서 뜻하지 않은 횡재를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교회 아줌마가 구원받으라면서 고맙게도 휴지를 나눠주고 있는 것이다. 그 아주머니는 정말 내게 구원이었다. 휴지를 받아 든 순간 나의 항문은 더 다급한 신호를 보낸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윽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나의 허리에 메어져 있는 안전장치를 풀게 되는데 그 동안의 나의 인내의 시간이 무색해질 만큼 그 짧은 순간이 아주 길고 고통스럽게 여겨진다. 이 엄중한 임무에서 실패하는 사람의 거의 대부분이 화장실과 매우 가까운 거리이거나 화장실에서 옷을 풀어재낄 때 실패하게 된다.

 

상황은 나의 무의식을 지배한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그렇다. 주위의 상황적 여건이 나의 무의식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무의식을 넘어, 나의 통증까지 조절하고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내가 어떤 내면의 상태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나는 고통을 느끼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통증의 다양성은 거기에 부합되는 특정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결론적으로, 특정한 어떤 결과를 만든 것은 점심 때 먹은 음식물일 수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결과물은 우리의 의식적인 부면임을 이해하게 된다.

 

이제 간단한 트레이닝의 시간이다. 사실,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피치 못해 이런 상황이 생길 때 한번쯤 지금의 이 글을 기억해 내고 적용해 보기 바란다. 복부에서 스믈스믈 통증이 올라오기 시작 할 때, 그 상태로 생각을 멈춰보라. 생각을 멈추는 간단한 방법은 통증을 느끼는 나 자신을 그냥 가만히 주시하는 것이다.

 

말을 건넬 필요도 없고 정형화된 명제를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냥, 마음속의 나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존재를 단순히 인지하듯 그냥 의식하면 된다! 그러면, 어느 때부터인가 정신 속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자아는 조용해 지고 통증은 가라앉기 시작한다. 만약, 화장실을 가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생각을 컨트롤 할 수 있다면 당신은 매우 순조로이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유의 생각 멈추기 트레이닝은 비단 배설의 충동을 억제하는데 만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실제로도 치료의 효과가 있다. 나는 실제로 그 효과를 체험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사실, 오래전에 무거운 물건을 들다가 허리가 삐끗했던 경험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 허리 신경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매력적인 내 엉덩이 대퇴부가 다리를 절룩거릴 정도로 통증을 느끼곤 했다. 이 무렵 나는 명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생각의 멈춤 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의 흐름을 저항하지 않고 멈출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바로, 바라봄 이었다. 즉, 화가 날 때 화를 내고 있는 나 자신을 인지하고 의식하듯 그냥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화를 내고 있는 자아는 부끄러운 듯 꼬리를 금새 감추고 만다. 슬플 때나 두려운 느낌이 들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트레이닝을 하면 할수록 그 효과가 나타나는 속도가 짧아진다.

 

생각의 흐름이 끊어진 상태에서 나 자신을 느끼며 통증이 느껴지는 상태를 그냥 바라볼 수 있다.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아픔을 인지하듯, 그러나 사랑스런 느낌으로 그냥 의식하라. 통증을 느끼는 자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아무 저항이나 정형성도 부여하지 말고 그냥 생각이 멈춰진 상태에서 의식하기만 하라. 가능하다면 눈을 감고 아픈 부위에 집중하여 그냥 사랑스런 느낌으로 주시하라. 효과가 빨리 올 수도 있고 천천히 올 수도 있다. 그러나 트레이닝을 하면 할수록 효과는 누적될 것이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 성과도 빨리 찾아올 것이다.

 

지금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 중에 나를 허리 아프고 절룩거리는 사람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시적으로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기도 전에 나는 완전히 치료되었다. 마비에 가까운 통증이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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