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의 깨달음

우리는 신의 존재를 '오해'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한아타 2022. 1. 31.

신의 존재에 대한 오해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나 인간의 잠재력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생각 자체에 에너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모든 것은 같은 것에서 출발한다. 에너지라고 하는 동일 소스에서 출발하는 셈이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에너지는 물질이 변화될지언정 다른 형태로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게 된다. 이것을 물리학적 정리로 에너지 보존의 법칙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어떤 유의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우리의 몸에 서로 다른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심지어 우리가 품고 있는 각각의 생각에 그만의 고유의 주파수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생각이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우리의 감정상태가 어떠하냐에 따라 그것이 우리의 건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의 생각 에너지가 물질로 이루어진 우리의 신체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물질도 에너지로 되어 있고, 생각도 에너지로 되어 있다면 주파수가 비슷한 두 에너지가 다른 에너지에게 영향을 주어서 일종의 공명 을 일으키는 것도 가능한 얘기이다.

 

이것은 이론에 불과한 얘기가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누군가 우리 곁에 있을 때, 특별한 이유 없이도 그 사람만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유쾌한 활력에 매료되기도 하고 한 사람 때문에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지기도 한다. 유아원에서 한 아이의 울음은 곧장 같은 방에서 놀고 있는 다른 아이들에게 전염이 되며 이와 같은 감정적 공명은 아이들 뿐 아니라,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성인들에게도 나타난다.

 

이 에너지 공명 현상 은 절대로 싱겁게 볼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실, 동양의 주역도 이와 같은 원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변의 것들을 통해서 본질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원리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주역을 점을 치기 위해서 쓰여진 문서 정도로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주역에서 말하는 유명한 글귀 가운데 하나가 ‘풀 한 포기를 뽑으면 주변의 동일한 부류의 다른 풀들이 뽑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바꾸어 말하면, 나를 통해서 주변을 알게 되고 주변을 통해서 나를 이해하게 된다는 이치인 것이다. 동양 특유의 에너지 공명 철학이 담겨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에너지 이면에 있는 감정적 요소

 

무언가를 창조하는 에너지 이면에 있는 감정적 요소는 무엇일까? 정신적 수행자들의 ‘명상’ 과정 중에, 주변의 사물(특히 자연)이 말할 수 없는 고요와 평온 속에서 나와 공명하고 일체화되는 것을 느끼게 되는 시점이 있다. 세상이 정지된 것 같은 고요 속에서, 나의 눈이 맞닥뜨려지는 나뭇잎과 풀잎 하나하나의 섬세함이 나의 시야 가운데로 빨려들 듯 들어오는 것이다. 피부로 일체성을 경험하게 되는 시점이다.

 

뭐, 이런 경험이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고 싶은 주된 요점은 일체성에 대한 생각이 우리의 내면에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이 특성을 통해 우리는 삶을 배우며 삶을 창조하기도 한다. 넓은 의미의 사랑의 범주에 속하는 다른 특성들 역시 나름의 창조성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특성들은 사람을 살아있게 하며 기동하게 한다. 시크릿 같은 책에서 말하는 이상화된 창조 활동들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영역에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가며 살아가고 있다. 눈에 보이는 창작 활동 뿐만 아니라,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체내의 활동들은 우리가 어떤 기분으로 어떤 활동들을 하느냐에 따라 여러 결과물들을 만들어 낸다. 긴장을 하면 침이 마르고, 어떤 일에 집중하게 된다. 지극히 신체적인 작용이다. 이런 작용은 생각에 영향을 받은 호르몬의 변화에 의해 생긴다. 우리는 이미 ‘나 스스로’라는 왕국에 좋게든, 나쁘게든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관점을 조금 바꾸어 보자. 우리 자신이 호르몬을 관장하는 어떤 세포일 수는 없는 것일까? 신체의 큰 흐름에 모종의 역할을 하는 ‘일부’일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충분히 그럴 여지가 있다고 생각 한다. 우리가 이 지구별에 온 이유와 현재 흐름의 포지션을 잡게 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의 세포가 단지 기계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신체의 흐름을 이해하고 순리적 흐름에 조화롭게 움직이는 방법을 깨우치게 된다면 어떠할까? 그야말로 우리의 몸은 더 없는 조화와 안정적 건강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순리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이유를 발견하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아이러니 하게도 그것은 자신의 삶의 흐름을 발견한다는 취지에서 ‘운명’과 ‘숙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말 이상하지 않나? ‘숙명’적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의 세포가 전체의 일부이듯, 그러나 온전한 존재이듯 우리 각자 역시 전체의 일부로서 온전한 존재이다. 각각의 세포가 연결되어 ‘나’라는 존재를 만들듯, 연결된 존재로서 모종의 목적에 기여하고 있다. 이 시스템적 흐름을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간에 목적으로의 흐름은 변함없는 변화와 발전과 치유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말하는 ‘신’이라는 존재는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나쁜짓을 하면 벌하는 식의 신이 아닐 수도 있다. 수십 억의 기도를 모두 인격체로서 끊임없이 들을 수 있는 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다. 그보다는, 우리가 순리적 흐름에 반하는 행동을 했을 때 우리 주변에 그와 관련된 유기적 현상이 일어나는 것과 더 자연스럽게 매치된다. 병균이 들어 오거나 상처가 났을 때 주변이 곪거나 하는 식으로 정화하는 ‘시스템적’ 작용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수십 억의 범법을 감시하고 기록해서 사후 세계에서의 ‘영원한 벌’을 준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의 ‘신’은 누구 혹은 무엇일까? 다시 한번 질문해 보자. 나의 신체에서 주관자이자 신체 내 현상의 창조자(신)는 누구인가? 다른 모든 것들과 연결된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를 이루는 각각의 유기적 존재(세포)는 어떤 존재 혹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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