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의 깨달음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근원적인 힘

한아타 2022. 1. 31.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근원적인 힘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요? 물론, 많은 자기 개발서들이 말하는 것처럼 "끌어당김의 법칙"도 매우 중요한 부분 중 하나입니다. 중국의 주역을 들추면 거기에는 시종일관 이 끌어당김의 법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풀 한포기를 뽑으면 그 주변의 같은 풀들도 함께 뽑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유상종" ...같은 것들 끼리의 어울림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주역에서 이야기 하는 부분 중의 하나이죠.

 

 

거기에 더해, 모든 것에는 상징성과 연관성이 있어서 주변의 현상을 보고 그 사람의 현재 상태나 내면의 상태를 가늠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모두 끌어당김이나 공명을 이야기하는 부분들 입니다. 하지만, 정작 제가 지금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런 것들과는 좀 다른 종류의 역학적인 부분입니다. 다른 종류의 자연 현상이죠. 이 부분이 바로 사회적 변화를 비롯해서 우리 주변의 여러 상황들을 만들어 냅니다. 물론, 생활의 창조와 관련된 부분도 마찬가지구요. 그게 뭐냐구요?

 

평형성의 원리

 

네...^^ 그것은 평형성의 원리입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 더해 이 평형성의 원리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연 현상입니다. 바람이 부는 이유를 아시나요? 그것은 기압의 차이로 생긴 불균형을 맞추려는 공기의 이동입니다. 비나 눈이 오는 이유도 마찬가지지요. 태풍이 생기는 이유, 해일이 일어나는 이유도 자연이 평형성을 이루려는 본연의 모습입니다. 우주 가운데서 일어나는 폭발이나 외적인 충돌 등도 각 별에서 일어나는 물질의 압력이 상대적으로 밀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불었던 고무풍선을 놓아버리면 바람이 빠지면서 날아가는 이유도 실은, 이 평형성을 맞추려는 자연적인 현상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형성의 원리를 이용해서 밥을 짓습니다. 그리고 평형성의 원리를 이용해서 로켓을 만들어 우주여행을 하기도 하고, 붓으로 그림을 그리며, 자전거를 타고 전화를 합니다. 잘 이해가지 않으신다구요?

 

밥을 짓는데는 기압의 차이와 물의 가열이라는 요소가 작용을 합니다. 이것은 온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향하려는 특징이 가미된 것이지요. 붓으로 그림을 그릴 때도 먹물을 잔뜩 머금은 붓과 포송뽀송한 한지, 그들 사이의 미미한 평형적이면서 수학적인 관계 그리고 이를 적절히 순간적으로 이용해서 기교를 넣어 손놀림하는 저작자의 테크닉이 더해진 것입니다. 전화에 쓰이는 전자기적 흐름 역시 전기력과 자기력의 강약이 소리신호로 바뀌어 전달되는 것입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공기는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향하며, 전기역시 고전압은 저전압과 평형을 이루려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렇듯, 평형성의 원리는 우리 생활 전반에서 적용되지 않는 면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 평형성의 원리를 역행하려는 것은 많은 부작용을 가져다 줍니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 되기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든지, 기타의 천재지변이 생긴다든지 하는 것이지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 자연의 평형성의 원리를 사용해서 삶을 살아가고 있고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평형성은 눈으로 확인 가능한 가장 빠른 반응을 보인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지요. 원인과 결과에 있어 이처럼 뚜렷하고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모든 물리법칙이 그렇듯 말이죠.

 

평형성의 원리를 이용한 삶의 변화

 

이제 중요한 것은... 바로바로^^ 이 평형성의 원리를 이용해서 우리의 삶의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연에 존재하는 평형성의 원리를 이용해서 밥을 짓듯이 말이지요.^^ 때때로 기술이 부족해서 밥이 탈 수도 있고 설익을 수도 있지만, 훈련이나 반복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성취를 만들어 내는 면에 있어서 더 능숙해지게 합니다.

 

단지 원하기만 하면 "다"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부족한 면이 있다고 말씀 드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성취 역시 물질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다른 역학적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역학적 관계의 중심에 바로 평형성의 원리가 존재합니다.

 

평형성의 원리를 우리의 실제 생활에 적용하기에 앞서, 한 가지 여러분께 여쭈어 보죠. 여러분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시나요? 맞습니다. 모든 것들은 두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건, 바로 에너지와 정보입니다. 이 두가지는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체계적인 창조에 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의지"라는 부분입니다. 의지를 통해서 창조의 체계성이나 독특성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똑같은 쌀을 가지고 죽을 만들 것인지 밥을 만들 것인지 아니면 떡을 만들 것인지는 오직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흔히들, 활발한 창조를 위해서 마음을 비우고 무상의 상태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의지"가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욕구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것과 의지를 없애는 것은 결코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의지마저 없다면 에너지는 무엇을 통해 그 방향성을 결정할까요? 그러므로 성취나 창조에 있어 "의지"는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자연스런 평형성의 원리에 의해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사용해서 창조 활동을... 다시 말해 우리의 일상 생활의 성취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저의 책이나 이곳의 다른 글들을 통해서 생각의 멈춤이나 관찰자적 시점을 유지 하는 것에 대해 읽으셨을 것입니다. 이 관찰자의 "인지" 혹은 "의식"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필요성이나 공백의 사실을 인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 가운데 존재하는 평형성의 원리를 생각해 보세요. 자연은 빈자리나 공백이 느껴지면 즉시 행동해서 그 자리를 매꿉니다. 비오는 날의 물방울들은 함께 모여서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향하거나 땅의 움푹 패인 곳에 고여 모이게 됩니다. 우리의 에너지가 고갈되면 우리 스스로를 이루고 있는 우리의 몸은 신호체계를 통해 배고품을 느끼게 하고 기여코는 입으로 음식이 섭취 되도록 합니다. 에너지의 밸런스와 평형성을 맞추는 것이지요.

 

자연 가운데 존재하는 평형성은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빈자리를 매꿉니다. 하지만, 이 평형성을 깨고 과다하거나 불균형을 이루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각에 의한 집착입니다. 흔히들 이것을 '애고'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관찰자적 시점이 되어 자연스런 '의식'과 '인지'를 통해 필요성이 확인되느냐와 우리의 생각이 "결핍에 의한 자각"에 의해 과도한 생각의 집착을 만들어 내느냐는 그 결과가 판이하게 다릅니다.

 

중독이나 분열, 갈등은 바로 이러한 생각의 회오리가 만들어낸 결과 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저변에는 "두려움"이라는 요소가 낮게 깔려 있습니다. 결핍에 대한 생각이나 빼앗길지 모른다는 조바심은 모두 이 두려움에 기인한 것들입니다. 책을 통해서 읽으셨다시피, 두려움은 창조가 아닌 파괴의 에너지를 가진 특성입니다. 이것으로는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좀 두서 없이 말씀 드린 것 같아 이쯤해서 잠시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창조의 에너지의 방향성을 갖게 하는 것은 "의지"인데, 이 의지는 결핍에 대한 집착이나 생각 가운데 존재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생각에 대한 관찰자적 시점이 만들어낸 평형성의 자각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움푹 패이거나 무언가에 부딛혀서 만들어진 내적인 혹은 외적인 상처들은 이러한 평형성에 대한 자각으로 인해 치유되거나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는 그 무언가가 있을 때, 그것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우리의 결핍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그것을 인지하고 관찰하며 바라보는 내면의 자아인 것입니다. 이것을 상위자아적 시점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에너지는 특정한 방향성을 띠게 되면서 그곳으로 잦아들거나 고이게 되는 것입니다. 에너지가 그곳에 흘러들면 곧바로 창조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창조의 결과가 나타나는데는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이미 창조적 활동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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