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 깨어나기

'치열함'에 대한 '경계'의 느낌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아타 2022. 1. 31.

치열함에 대한 경계

예전에는, 치열하게 사는 삶의 모습을 가치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삶의 치열함을 '경계'하는 나 자신을 응원한다.
.
열심히 인생을 사는 것, 신념과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것,
의분과 의협심을 가지며 사는 것,
책임과 의무를 목숨처럼 여기는 것...
이런 것들을 '경계'한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가장 소중하고 값진 것들을 만들어 낸다고
나는 믿고 있다.
.
하지만, 주변 세상으로부터 자신이 눈을 가리고
삶이나 세상을 고난이자 악몽이라고 여기게 하는
생각의 '지속적인' 방향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 경계시키려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곤 한다.
.
이건, 인륜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회피하려는
비겁함과는 다른 문제이다.
나 역시도 어려서부터 환경 운동이나 인권 활동을 해왔고
양심이나 도덕적인 특정 문제에 있어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민감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생각의 방향성

그러나... 그러나.... 다른 한편, 나의 정서적 지향성... ㅎ
환경문제를 평생의 과업이나 목숨처럼 여기는,
종교적 깨달음과 수행을 삶의 가장 중요한 방향성으로 여기는,
정치적 의협심으로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여기는,
.... 그런 사람들을 존경하고 정말 대단하다 여기지만,
나 자신을 열어 부끄러운 속살을 드러낼 정도로 친밀함을 느끼거나
그들과의 대화에서 필요이상의 에너지를 소진하고 싶어하진 않는다.
.
때때로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려면...
세상은 고난을 만들어 내는 곳이어야 하고,
불공평과 더러움을 양산하는 곳이어야 하고,
구원해 줄 가련한 존재들이 살아가는 곳이어야 하고,
차별과 오염을 만들어 내는 곳이어야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에게는 이 곳이 멸망 받기에 합당한 곳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들이 현재 기울이는 노력과 가치관의 정체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그분들의 생각의 방향성에는 부정할 수 없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걸 안다.)
.

진지하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눈

.
암튼... 나이가 먹어서일까, 지쳐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세상에 대한 소음 공포증일까?
어느 때부턴가...
그런 '치열함'에 대한 '경계'의 느낌이 생기기 시작했다.
심지어, 자연스런 시각을 한정하는 '긍정주의'나 '긍정적'이라는 말도
별로 좋아보이지 않게 되었다.
.
슬프면 슬픈대로, 아프면 아픈대로...
기쁘거나 행복하면 그걸 느끼는 그대로.
삶의 소소한 장면들을 소중히 여기고 존재 자체로 사랑하는
진지하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눈'을 사랑하게 되었다.
.
물론... 삶의 고통스런 순간에는 때때로 그걸 이길 수 있는 '긍정'이라는 마취제가 필요하다.
주체할 수 없는 경박한 에너지가 내 품위를 갉아먹는다면, 그걸 잠재울 인위적 진지함과 안정제도 필요하다.
그러나, 약이 필요할 때 처방을 하는 것과 '약물 중독'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예컨데, 내적인 회귀와 안정과 희망을 위해 '만트라' 암송을 할 순 있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만트라' 암송만 하면서 살 순 없는 문제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정신적 구도와 헌신의 희생을 제한적으로만 실천하는 나만의 경우이다. )
.
인생의 코너링을 만나게 되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상황을 제외하고
인생 자체의 전체적 방향성이 '치열함' 그 자체인 모습들을
내 삶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누'를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 인생은 '내 삶'이니까...

.

댓글

자동 창 열기

자동 창 열기

작가 한아타의 세상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