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의 깨달음

소명감을 가진다는 것과 자유롭다는 것

한아타 2022. 2. 4.

소명감 그리고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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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신학을 공부했던 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성경 구절은
요한 8:32 의 말씀이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내가 이 말씀을 특히 좋아했던 이유는,
경전의 말씀을 따른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부자연스럽고 부자유스럽다는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목회 활동을 그만 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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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자유는 '방종'과 혼동이 되면 안된다.
'자유'안에 있다하여 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모든 자유는 '인륜적' 가치나 타인의 행복 추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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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바꾸어 말한다면,
인륜적 가치나 행복추구권의 침해 가이드라인을 벗어나는
어떠한 전통이나 가치부여, 의미부여도
거추장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것들로 인간의 '자유함'이 망가뜨려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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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가치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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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전통'이나 부수적 '가치부여'에 치중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행동은 지극히 '하느님의 말씀'이라거나 '경전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들이 미쳐 깨닫지 못하는 함정이 있다.
가치관에 따른 특정 행동들은 순수성을 이야기하기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필터링을 거쳤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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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최초의 경전 이후에 적어도 천 년 이상이 지난 기록들의 번역본을 우리가 보고 있다는 것.
그 유구한 시간 동안, 자의든 타의든 수없이 많은 편집과정이 가해졌다는 것.
수많은 이해관계에 의해, 종파나 교파적 편집이 이루어지면서 원래의 의미가 퇴색되었다는 것.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개인적 의미부여와 소명감, 가치부여의 의해
그나마 왜곡된 경전 말씀에 한차례 더 '포장'이 이루어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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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사람이 가진 가치관적 정형성이
나름의 '가치'와 소중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절대성 부여'이다.
그렇게나 많은 필터링을 거친 것들에
'절대적 의미'와 '특별성', '최고성'을 부여하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불편함이 생기는 건 어쩜 당연한 순서이다.
십자군 전쟁이나, 마녀사냥... 비단 이런 역사적인 큼지막한 사건들 뿐 아니라
개개인들간의 불편한 심리적 느낌이나 소소한 의견 대립들도
많은 경우 이런 '특권의식'에 의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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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관계에 의해 필터링 된 컨텐츠로 만들어진 사람들의 액션은
그것이 아무리 순수한 동기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신의 의견'이 아니라, '내가 싫어서 안하는 행동'이거나
수십년 혹은 수백년전 '누군가'가 교의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전통'에 의한 몸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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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의 포로'나 '신성한 꼭두각시'는 그렇게 만들어 진다.
그리고 평생을 거쳐 그것은 지워지거나 벗어버릴 수 없는 것이 되어
죽을때까지 '행복한 굴레'가 된다.
행복하면 된거 아니냐고?
마취가 된 몽롱한 정신이나 최면에 걸린 자아, 마약에 찌든 영혼에 대해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고 우리가 이야기 하지 않는 이유는
그 안에 자신의 '본질적 자아'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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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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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의 속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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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지 않은, 자유함이 없는 관념의 속박은
자신을 병들게 하고 주변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본인 스스로는 이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꼭 해야 하는 것', 어겨서는 안되는 것, 기여코 만들어야 하는 것...
그래야 자신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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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적인 '소명'이라는 것이 매우 가치있고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로인해 본인이 아닌 가족과 벗들이 감당해야 할 어려움과 불편함이 있다면
나는 그 소명을 '절대적으로 옳은것'이라고 말해 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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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자신이 가진 관념과 '소명'은
'자유의 영'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부자연스러움을 만들어 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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